며칠 전 법원에서 보낸 서류를 하나 받았다.
발신은 수원 지방 법원.
얽힐 일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순간 움찔했다.
게다가 내가 사는 곳도 아니고 수원?
개인 정보 해킹이나 명의 도용으로 뭔가 발생했나?
악성댓글 단 적도 없는데...?
다른거 다 떠나서 제발
개인정보 누출로 인한 금융사고만큼은 아니길 바라며 뜯어 봤는데...
기억도 안 나는 오래전 일로 인한 공탁금 지급이 있으니
5만원 받아가란 내용이었다.
0 이 하나 더 있나 싶어 유심히 봤지만
옆에 친절하게도 한글로도 5만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쨌거나 준다니 일단 챙겨 받아야지 하고
안내문을 마저 읽어보니
오호라~ 법원 안 가고 인터넷으로 신청해도 된다네?
세상 참 편리해졌군~
하면서 지정 싸이트로의 접속을 시도했다.
법원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신청 전용 싸이트 였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서너 개의 액티브 엑스와 무슨 무슨 프로텍트니
하는 것들을 깔라고 요구해 왔다.
지난 봄 윈도우 재설치 후
뱅킹은 폰으로 하고 쇼핑은 노트북으로만 하면서
집컴은 완전 청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괜찮아. 작업만 완료하고
깔린 것들 언인스톨 시키면 돼.
하는 마음으로 요구하는 대로 깔기 시작했다.
난 원래 크롬을 쓰지만 지원 안 할거 뻔하니
애초에 익스플로러로 접속을 시도했다.
크롬은 지원 안 한다는 안내창과 종료 돼버리는 허망한 상황을
미리 피해 갔다는 사실에 내심 흐뭇해하며
진행을 하는데......
지금부터는,
조금이나마 일목요연하게 서술하기 위해
단계별로 번호를 붙여 간단명료체로 적어보려 한다.
1.
접속하자마자 기다렸다는듯 서너 개의 잡다한 것을 깔기를 요구 받음.
예상했던 수순이라 흔쾌히 수락하고 회원가입까지 하고선
신청서를 작성하려 하니 공인인증서 인증을 받아라 함.
2.
usb에 있는 인증서로 시도하는데
이게 단순히 비번만 입력하는게 아니라
또 2개 정도의 이상한 것들을 깔라고 요구함.
시작과 동시에 6개를 까는 초반 폭풍러쉬에 살짝 당황함.
3.
살짝 후회 됐지만 꾹 참고 확인 확인 눌러가는데
그 와중에 열려진 브라우저를 닫고 하라 하길래
'확인' 눌렀더니 작성중인 창까지 모두 닫겨버림 헐...
4.
뭥미?? 하며 다시 익스플로러 실행하고
로그인 하고 요구하는 것들 마저 다 깔아준 뒤
공인인증서 인증까지 완료함.
참고로, 이 과정은 단순한 인증서 비번 확인이 아니라
사용중인 인증서를 법원에 등록하라는 절차였음.
5.
인증서 등록후 신청서 작성항목의 빈 칸을 채워넣는데
지급 계좌를 적는 항목이 있길래 적어 넣으려니까
이번엔 계좌 인증을 받아라 함.
6.
계좌 인증을 받기 위해 또!!! 뭔가 이상한 걸 컴에 깔자 함.
7.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지만
이왕 시작해 버린 거...하자는 대로 다 깔아 줌.
벌써 10개 가까이 되는 듯.
어느새 나는 예스맨.
8.
다 깔린 후 계좌 인증을 받기 시작하는데
어찌나 확인 확인 다음 다음 누를 게 많은지....
막판엔 또 뱅킹용 코드번호 입력도 한 번 하자 함.
이 정도야 뭐 귀찮을 거 없다 싶어 지갑 꺼내 코드표 봐가며 입력 완료.
9.
이젠 다 됐다 싶어 서류 작성 완료후
제출 버튼을 누르려 하니 뭔가 첨부서류가 하나 빠졌다 하네?
10.
인터넷 신청은 첨부서류 필요없다고 안내장에 쓰여 있더만 이 무슨!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첨부 서류 안내목록을 열어보니
등본 하나면 될 것 같았음.
11.
근데 등본이...당장 없기도 하지만 첨부하려면 스캔해서 pdf나 jpg로
해야 하는거니 집에 복합기가 없는 나로선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음.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등본 준비해서 다시 도전해야지 하고 내일로 미루려 하던차에
12.
아!! 인터넷으로 등본 발급 된다던데?
싶어 검색해보고 '민원24'란 싸이트가 있단 걸 알게 됨.
13.
민원24 접속, 회원 가입은 귀찮으니 비회원으로 등본 신청을 시작함.
아니나 다를까 또 뭔가를 두 개쯤 들고 나오더니 깔라고 요구함.
이제 와서 반항할 수는 없으니 순순히 다 깔아줌.
이 과정에서도 또 공인인증서 로그인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뭔가 지저분한 걸 3개쯤 깔자고 또또또! 요구 받음!!!
14.
하.......어차피 망가진 몸, 하자는대로 깔아 주는데,
추가탭에서 작업하던거라 옆의 탭에선 여전히 법원싸이트 서류 작성창이 열려 있었는데
이번엔 브라우저 닫아라가 아니라 아예 컴을 재시작해라 함.
이런 망할...
15.
눈물을 머금고 확인 누를 수 밖에 없었고 서류작성 과정 다 날아감!!
16.
재부팅후 과정은 법원 로그인후
위 5~8번 까지 다시 한 번 수행해야 했음.
이전에 한 번 했어도 새로 로그인하면 그 때마다
인증서확인, 계좌 인증 절차, 코드표입력등을 새로 해야 함!!
17.
민원24 다시 접속해서 등본 신청 완료 !
엥??
신청후 프린터 출력이란 항목을 선택하지 않으면 발급이 안 된다네???
jpg나 pdf 방식의 발급은 지원을 안하는 거였다!
말했다시피 난 프린터가 없다. 미쳐..정말!
18.
여기까지 첫 날의 도전기였음.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이런 더러운 꼴 안 보고 인감증명 하나 들고
법원 가면 되는 거였지만 오기가 생겼음.
19.
다음날 프린터가 있는 친구 사무실에 들러
등본신청하고 등본 출력함!
스캔까지 받아서 jpg로 저장해서 담는데 성공.
이 과정에서 친구한테 밥 사야 했음!
20.
집에 와서 이틀 째의 도전기를 시작함.
21.
법원 로그인후 이제는 익숙해진
인증서 확인, 계좌 인증 절차, 코드표 입력등을 수행해 줌.
간단해 보여도 이 과정에서 확인과 다음 버튼등을 한참 눌러줘야 하고
팝업창과 체크 항목 응답창도 대여섯 개 뜸.
22.
준비된 등본화일 업로드 하고 다음 버튼 눌렀더니
뭔 스크립트가 오류 났니 어쩌고 하더만 이전 버전이니 업데이트 하자고 요구를 함.
그래..해주겠다만 설마 또 재시작 하자는건 아니겠지?
후...심호흡을 하고 그래 깔아라 함.
23.
업데이트중 한참 멎어 있음!!!!
24.
결국 기다리다 기다리다 응용프로그램 강제종료 함!
열려진 브라우저 다 닫히고....
익스플로러 재실행 하고
그 놈의 지긋지긋한 법원 로그인, 공인인증서 로그인, 계좌인증 절차밟고 코드번호 입력하고....
25.
앞서의 스크립트 어쩌고 까지 힘들게 도착하고선
새로 깔자는 걸 그냥 무시 눌러버림!
그랬더니 그냥 다음으로 넘어가네? 진작 이럴 걸!!
26.
드디어 등본 첨부하고
신청서 완료후 제출까지 눌렀음.
이 제출 버튼까지 오는데 이틀이 걸리다니 ㅜ.ㅜ
27.
근데 갑자기 안내창이 띠링~ 하더니
평일은 18시까지만 접수 받는다고 함.
그 때가 저녁 9시 가량.
아니! 온라인으로 신청서 넣는거니
낼 아침 출근해서 확인하면 되지, 6시 마감은 또 뭐야?
법원 서버는 6시 되면 퇴근하나???
나참....
이로써 이틀 째도 성공직전에서 엔딩을 못보고
분노의 눈물을 삼키며 도전기를 종료함.
28.
다음날 도전 3일째.
이번주 내가 모처럼의 주간 근무라
퇴근하고 허겁지겁 달려오니 오후 5시 15분쯤.
오늘은 기필코 성공하리라 결의를 다지며
급하게 컴켜서 법원 로그인 시도함.
로그인후, 이제 눈감고도 할
법원 로그인, 공인인증서 로그인, 계좌인증 절차밟고 코드번호 입력하고
등본첨부하고 신청서 내용 입력까지 일사천리로 달림.
29.
드디어 제출을 눌렀는데 또 안내창이 띠링~
30.
내가 받을 계좌는 농협인데
법원 담당 계좌는 신한은행이라 타행이 되니
타행 계좌가 포함된 신청서 접수는 오후 4시까지만 받는다 약오르지롱~~
하는거다.
WTF !!
내가 졌소! 내가 졌다고! you win !!
뒤에 '약오르지롱'은 아마 반쯤 넋이 나간 나의 착시였으리라.
깊은 내상을 입은 나는 겸허한 자기반성을 했다.
대한민국 법원을 물렁하게 보고 감히 마우스 클릭질 몇 번으로
서류를 제출하려 했던 나의 오만방자함에 대한 반성이었다.
허허..
내가 5만원 받아 갖고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리하여 어쨌거나 3일째 도전기도 허탈하게 종료함.
4일째는 금요일이었는데 해 볼 필요도 없이 시간을 못 맞추겠고
5일째와 6일째는 주말이라 접수자체가 안 된다 함.
대한민국 법원서버는 평일은 6시에 퇴근하고 주말은 출근 안 한다는 사실!
결국 자연스레 3일을 또 그냥 흘려보내게 되고
책상위 법원 서류는 일주일째 굴러 다님.
31.
시간상 1주일이 흘렀지만 도전은 4일째.
원래의 야간 근무로 돌아온 나는
점심을 먹고 다시 법원 로그인을 시도했는데
아무런 저항없이 제출 버튼까지 술술 흘러갔고
드디어 그토록 갈망하던 '접수완료'란 글자를 볼 수 있었음.
너무 쉽게 끝나서 약간 놀라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상황종료.
the end ~
후기
이로써 모든 과정이 끝나게 되었는데
7일이 흐르다보니 세세한 기억이 완전치 않아서
깜빡 빠뜨린 단계도 있고 글로 적기 애매한 상황묘사를
해야 할 것 같으면 그냥 생략했다.
그러니, 위에 적은 내용보다 현실은 조금 더 장황하고 길었다고 보면 된다.
모든 정리가 끝난 지금
맘에 안 드는 사실 하나는
분명히 이 일련의 과정에서 설치를 요구받고 깐 잡스런 쓰레기들이
15-16개 였는데 정작 프로그램 추가 제거 에서는
달랑 6개만 올라와 있다는 사실이다.
찝찝함 보다는 괘씸해서 포맷하고 새로 깔고 싶다.
그리고 어제 받은 문자 하나.
저 문자와 함께 5만원도 입금되었다.
최후의 승자는 나였던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