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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형을 형이라 못 부르고


















나는 장남이고 인간관계의 폭도 그다지 넓지 못해서 

살면서 형이나 누나라 부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린 시절엔 형이나 누나란 존재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같은 게 있어서 

방학때면 항상 며칠씩 묵고 왔던 시골 외가쪽의 이종 사촌 형들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머무는 내내 졸졸 따라 다녔었다. 

더욱이나 아버진 혼자시기 때문에

내겐 사촌도 전혀 없던 터라 이종형들에 대한 나 혼자만의 짝사랑은 은근히 각별했었다. 

동갑이나 손아래의 이종들이 있었음에도 형들을 따라 다니고 그 속에 어울려 있는게 더 좋았었는데, 


형들은 아마 귀찮았으리라. 도시에서 온 코흘리개가 자꾸 따라 다니며 귀찮게하고 

개구리 메뚜기 잡으러 논이며 개울로 다니며 노는데 

그런 생활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친척 동생은 얼마나 민폐였겠는가. 


방에 걸려 있던 까만 교복과 모자, 그 옛날의 책가방과 앉은뱅이 

책상이 주는 비주얼들은 또 왜그리 근사해 보이던지... 


이른 새벽, 닭울음 소리에 잠을 깨어 

부스스한 몰골로 방문을 열고 나가 보면 아침 안개가 마당에 자욱한 가운데 

밥짓는 냄새가 솔솔 났었고 그 한 편에선 런닝에 교련복 바지를 입고 

소 여물을 준비하던 형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기를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이내 다시 돌아와 이불속으로 기어 들어 갔는데 

그래도 그 장면은 계속 보고 싶어서 문을 반쯤 열어둔 채 엎드려 

형들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 보다 다시 잠이 들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에도 형들에게 제대로 형이라고 불러 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뱉는 형이란 단어가 너무도 어색해서 내 스스로가 견딜 수가 없었던 탓이다. 

홀로 연습도 해봤지만 막상 실전에선 제대로 써 보지도 못했다. 

내가 구사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XX형은 어쩌고 저쩌고~ ' 하는 식으로 

문장속에 섞어 쓰는 정도의 용법이 다였다. 

호칭으로만 단독으로 한 번 불러 주는거, 그게 안되는 거였다. 


사실, 호칭없이 바로 문장을 시작해도 별 어색하지 않기 때문에 

나도 그 이후엔 연연해 하지 않았고 형들은 아마도 

그랬었단 사실 자체를 인식도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형이나 누나에 대한 내 동경은 많이 희석되었고 

방학때면 외가를 가던 연례행사도 차츰 줄어들어 만남의 횟수도 자연스레 뜸해졌다. 

그 이후 살면서, 형이나 누나로 불러야 할 사람이 아주 드물게 잠깐씩 

나타나긴 했지만 역시 나는, 형이나 누나라고는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입속에 그 단어를 머금고만 있어도 나는 이미 오글거렸던 것이다. 


도대체 형, 누나의 억양은 어찌해야 하는거며 

상황별 그 미묘한 인토네이션의 변화를 그 한 음절 두 음절이 발음되는 

찰나의 순간에 어찌 처리해야 하는건지 하나도 모르겠는 것이다. 


홍길동의 심정이 이러 했을까?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증상이지만 어쩌겠는가?  내 몸이 저절로 그리 반응하는걸. 

그 이유를 굳이 찾아 보자면

내 속마음이야 충분히 친밀하다 여기지만 그걸 굳이 호칭으로 불러준다는 건 

지나치게 오버스런 애정공세라고 내 속에서 판단한다는게 문제이지 싶다.

이해 안 된다고? 나도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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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온 분은 나보다 5살이 많은데 

따로 직급이 없으니 그냥 아저씨라고 편히 불렀다.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이런저런 표현을 하며 다가오는게 보이는데 

이런거에 또 역시 익숙하지 못한 나는 처음엔 몸을 사렸다. 

성격이나 취향, 살아온 인생사 뭐 하나 닮지도 비슷하지도 않았다. 부담스러울 수 밖에. 

그런데, 카톡에 응답이 늦거나 통화가 귀찮아서 전화를 안 받거나 하면 

어찌나 서운해 하던지.. 어쩔 수 없이 내가 쌓은 벽의 높이를 조금 낮춰야 했다. 


그렇게 친분이 쌓이다 보니 술자리도 갖고 중년의 남자끼리 

자주 커피도 마시러 다녔다. 이러는 동안에도 김씨 아저씨란 호칭에 

난 전혀 불편이 없었는데 은근히 형이라 불러주길 원하는 눈치고 

종종 스스로 '이 형이 말이다' 하는 식의 대사를 하니 적응 안 되긴 했지만 

술자리에서 시험삼아 형님이라 한 번 불러보긴 했다. 

해놓고 나니 아~ 정말 닭살 돋아서리!! 

그래서 그냥 속편하게 또 다시 포기했다. 


내 나이가 적잖으니 앞으로 살면서 나보다 윗 연배의 분을 만나 

어찌 불러야 하나를 고민하는 상황은 그다지 많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다행이란 생각도 들고 아쉽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