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가 중단 되었다.
판매자는 판매를 원했고
구매자는 구매를 원했다.
그런데도 거래가 중단되었다.
판매자 입장에서,
재고는 충분히 있었으며
구매자 입장에서 보자면
가격과 품질에 모두 만족했으며
필요시기도 당장이었으며
심지어는 지갑에 돈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거래가 중단되었다.
그 일은
12월 초의 어느 날 벌어졌다.
이제 아무도 늦가을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한겨울은 아니다.
이 중간에 낀 시간,
12월을 대개는 초겨울이라 부른다.
늦가을이라 부르는 이는 극히 소수이리라.
그는 그 소수중 한 명이다.
초겨울이라고 인정해서
한 해의 끝과 시간의 흐름을 승인하는 게 마땅찮았기 때문이다.
4학년 2학기, 졸업과 취업을 앞둔 그는
방학숙제 하나도 안 하고 개학 전날 밤을 맞이한
초등학생의 심정으로 매일매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 어정쩡한 시간을
겨울이라고 불러라 라고 강요하는 건
너무 비정한 처사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시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한없이 늘어지고 싶은
그의 마음속 시간은 여전히 늦가을에 멎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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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가 빨리 끝난 학생들은 이미
겨울 방학에 들어가 교정에는 이미
눈에 띄게 사람수가 줄어 있었다.
오후 4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도서관을 나서기엔 이른 시각이지만
밤새 구직 싸이트를 헤매며 이력서 넣고
이제는 내용을 달달 외우고 있는
자소서를 또 끄집어 내어 표도 안 나는
사소한 조사들을 다듬으며
허망한 일방통행식 구애의 시간을 보냈던
피곤한 그의 육신은
그만 짐 싸서 집에 가기를 칭얼대며 요구해 왔다.
늘 그랬듯 아침 건너뛰고 점심은 라면이었던
틀에 박힌 패턴에서 오늘은 식당까지 가기 귀찮아
점심까지 굶었으니 바닥까지 내려앉은
피폐한 심신의 요구를 더이상 외면하기도 힘들었다.
밥을 먹고 다시 도서관을 갈 수야 있겠지만
그는 이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컨디션으로 돌아와서 이후 도서관에서 보내는
저녁시간의 그 삭막함과 우울함,
집중력 저하와 싸우며 시간만 채우는 것은
고문과 다름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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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 횡단보도 옆에는 오뎅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다.
붐비지 않으면 가끔 사먹곤 했었는데,
그는 가방을 챙기며 이미
오늘은 먹고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여고생 한 무리와 아이를 업은 애기엄마 하나,
파란 슬리퍼를 신은 그의 또래 아가씨가 하나.
모두 6명 손님이 있었다.
엄마의 등에 업혀 오뎅꼬지를 손에 든
아이까지 친다면 7명.
그 아이와 함께 이 공간에서 유이한 남성이 된 그.
평소의 그였다면 쑥스럼 많이 타는 성격탓에
낯선 여자들 틈에 끼어들어 여성 취향적인
군것질을 같이 하기가 어색해서 지나쳤겠지만
오늘은 '평소'가 아니지 않은가?
조용히 구석에 어정쩡하게 자리잡은 그는
차분하게 하나를 집어들고 우물거리기
시작했고 금새 두 번째 꼬지도 집어 들었다.
기계적인 입놀림과 손짓은
점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빈 꼬지를 내려놓는
텀도 급속도로 짧아지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원래 좋아하기도
했던지라 처음의 조심스러움을 잊은 채 허겁지겁 먹었다.
꽤나 먹었다는 걸 느꼈지만
속도가 너무 빨라서
대충 씹어삼킨 오뎅의 잔해물들이
식도에 기차처럼 길게 늘어서는 통에
아직 위에 도달하지 못한 양이 많아서인지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을 진지하게 수행중이던 그의 눈에
일순 자기 앞에 수북히 쌓인 빈 꼬지가 들어 왔고
그걸 보는 순간
멈칫 하며 브레이크라도 밟은듯
입속 오물거림이 느려졌다.
너무 많은 꼬지가 주는 당황스러움.
이걸 다 내가 먹었다고?
힐끔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없었다.
다 큰 어른이,
그것도 남자가
길거리에 서서,
오뎅을,
여자들 틈에 끼어 서서,
거의 처먹는 수준으로,
게걸스럽게
입안으로 쑤셔넣다가
문득 사회적 시선에 눈 뜬 것이다.
고개도 못 돌리고 곁눈질로 느낀 분위기는
모두들 자기만 주시하는 것 같았고
뭔가 좀 궁색하고 초라한 존재가
돼버린 기분을 느낀다.
심지어는 주인 아주머니의 눈치마저
흐뭇함이 아닌 뭔가 안쓰러운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한 입 베어 먹었던 오뎅의 나머지를 급하게 억지로
꿀꺽 삼켜버리고는 서둘러 지갑이 든 뒷주머니에 손을 댔다.
목이 메어 물을 마시고 싶었고
뜨끈한 오뎅국물의 식후만찬은 시작도 못했지만
그보다 더 다급한 건 서둘러 거기를 뜨는 것이었다.
빈 꼬지는 언제 이렇게 많이 쌓인걸까?
갑자기 모든 행동을 중지한 그를 바라 보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뒷주머니속 지갑을 꺼내 드는걸로 의사전달을 했다.
아주머니는 흘깃 그의 앞에 쌓인 빈 꼬지를 보고선
안 했으면 하고 바랐던 멘트를 기어코 날렸다.
아이고 많이도 자셨네..
옆의 여고생 무리속에서 웃음소리가 살짝 들렸고
파란 슬리퍼 여인의 입꼬리가 분명 씰룩였다.
배가 많이 고팠음에 대한 해명을 해야겠다 싶었지만
어버버 하며 구차한 대사를 하느니
자제하기로 한다.
말없이 고개만 두어 번 끄덕이고는
지갑을 꺼내 펼쳐들고
손가락을 집어 넣는 액션을 일부러 조금 크게 취했다.
어서 계산을 해 달라는 무언의 시위이자 압박이며
빨리 상황을 종결시킬 유일한 비책이다.
완판 직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판매가 중단돼버려 의아스런 표정을 잠시 짓긴 했지만
주인 아주머니는 곧 아쉬움을 접고
널부러진 빈 꼬지들을 익숙하게 촤르륵 모아 쥐고선 갯수를 세었다.
갯수가 많으니 한 번만 더 세어 보겠다는
잔인한 대사가 날아와 그의 내면 자아에 깊은 생채기를 하나 더 냈다.
shut the fuck up! and take my money!
물론 이 대사는 그의 입속에서만 맴 돌 뿐이다.
어색해진 손가락이 계속 지갑을 벌려 놓은 채
정지화면처럼 멎어 있었고
여고생들의 수군대는 대화의 주제가 마치 자신인 것만 같아
그 짧은 시간의 계면쩍음은 숫기없는 그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21개니까...10,500원 입니다~
500원은 빼 드릴게~
그는 분명히 느꼈다.
모두가 기다렸던 시상식의 발표 순간처럼
짧은 정적이 장내에 가득했었고
금액 발표와 함께
일순 주변에서 작은 술렁임이 있었던 걸.
아침 방송의 객석에 앉은 아줌마들이 피디의 손짓에
맞춰 내는 기계적 탄성과는 질적으로 다른
순수하게 우러나온 심연의 탄성들.
최대한 빠른 손놀림으로 셈을 치른 그는
여유있는 척을 가장하며 절제된 몸짓과 발걸음으로
최대한 빠른 동선이라 생각되는
루트를 잡아 탈출을 시작했다.
상체는 여유있는 척 움직이는데 하체만 빨리 움직이는
그 부자연스러운 몸짓은 마치 수면위 백조의 모습과 같았으리라.
자리를 떴음에도 호기심어린 시선들이 여전히
따라오고 있음을 감지한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포장마차와 횡단보도는 5미터 남짓 거리인데
그 짧은 거리의 이동중에
그는 또 한 번 대위기를 맞이했다.
튀어 나온 보도블럭 하나에 스치듯 발끝이 걸렸고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멀리뛰기 선수가 공중 도약에서 팔을 휘젓듯
허공을 힘차게 양 팔로 번갈아 휘젓고는
휘청거리며 호랑나비춤을 췄던 것이다.
아싸 호랑나비~ 대신
어이쿠! 하는 단말마같은 외침이 달랐을 뿐.
그 외마디 외침마저 슬펐다.
종일 말 한 마디 안 했던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대사인데
목청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쏟아낸 통에
기묘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힘차게 발사되었다.
그의 한 뼘 멀리뛰기와 기괴한 단말마는
지나던 이들의 시선을 일시에 끌어 모았고
포장마차 여인들 또한 고개 내밀어
재차 관심을 표해왔다.
원치 않은 과다한 관심에
그의 얼굴은 이제 표나게 달아 올랐다.
그에게 오늘 닥친 유일한 행운은
횡단보도가 때 맞춰 녹색불이
들어오는 바람에 지체됨 없이
그 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 유일하다 하겠다.
짧은 순간 그 일대에서 가장 관심을 끌어 모았던
반짝스타는 한동안 잽싼 걸음을 놀려 이슈의 현장을 벗어났고
골목 안 편의점 옆 그늘진 자리를 찾아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물고서야
우스꽝스러웠던 자기 모습을 추스르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제 아무도 그를 주시하지 않았고
일련의 모든 과정을 지켜봤던 포장마차 여인들의
집요한 시선도 진작에 멀어졌다.
모두들 일상의 소소한 흥미거리에서 그를 놓아줬건만
그의 마음은 아직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부터 도서관 다니는 코스를 바꿔야 하나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담배를 비벼 끄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딸랑, 편의점 문이 열리며 편의점 알바가 고개를 내밀었다.
거 알만한 사람이 남의 가게앞에 꽁초를 버립니까?
짜증스러움이 묻어있는 정당한 일갈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숙였고
우물거리듯 사과하고 꽁초를 주워 든 그는
또 한 번 도망치듯 황망하게 자리를 떠야 했다.
눈물이 나려 한다.
춥다, 어서 집에 가고 싶다.
너무 가고 싶다.
눈물나게 봄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