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2학년,
구구단을 처음 접했다.
선생님은 구구단을 외워 오라고 숙제를 내며
다음 날 한 명씩 앞에 나와 외우기 시험을 볼 거라 하셨다.
집에 와서 나는 무척이나 열심히 외웠고
밥상앞에 앉아서도 한 손엔 책 한 손엔 수저를 들고 외웠다.
나는 단순 무식하게 달달 외우는 걸 잘했는데
텍스트로 된 것들을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 넣는 것에 아주 능했다.
시든 문장이든 역사 연표의 숫자든 지명이든 사람 이름이든,
하여튼 텍스트로 된 걸 무턱대고 외워야 할 때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잘 해냈는데,
(그에 반해 눈으로 본 걸 기억하는 건 젬병이었다.
갔던 길 다시 가도 헷갈려 하고 어제 저 사람이 뭘 입었던가,
아들의 귀 뒤에 있는 점이 오른쪽이든가 왼쪽이든가 등
시각적 기억력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많이 부족하다. 눈썰미가 없는 편이랄까?)
하여튼 난 성공적으로 구구단을 다 외웠고
다음 날 수업 시간 내 차례, 조금 버벅거리긴 했지만
무사히 성공했었는데 거의 대다수의 아이들이
틀려서 손바닥을 맞았던 걸로 기억한다.
성공이야 했다만 그 전날 내가 쏟아 부은 에너지를 생각하면 어휴...
왜 힘들었냐면?
구구단 전체를 텍스트로 보고 외운 것이다.
구구단이란 게 뭔가?
결국 더하기가 차례대로 누적되는 거 아닌가.
4x1=4 했으면 그 다음 4x2=의 답인 8은 외우는 게 아니라
4를 더해 주면 8이 되는거다
이런 식으로 원리를 이해하면 전혀 외울 필요가 없는 것이 구구단 아닌가.
물론 그럼에도 외워야 하는 이유는 있지.
돌발적으로 7x6=? 의 답을 빨리 구해야 할 때
처음 부터 칠 일은 칠 칠 이 십사...하며 외워 올라오기엔
너무 번거로우니까.
생각해 보면 얼마나 무식한 방법인가?
구구단을 국민교육헌장 외우듯 전체를 글자로 보고 외웠다니.
무식한 걸 떠나서 아무리 어렸다지만
기본적 원리에 대해 감도 못잡았단 얘기니 지능이 좀...?
세월이 좀 흐르고
난 뒤늦게 뜬금없이 당시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굳이 무식하게 외워야 할 필요성이야 인지했지만
애초에 왜 구구단의 원리에 대해 얘길 안해줬던 걸까?
.
.
.
지금의 회사에 처음 왔을 때.
전혀 생소한 일, 너무도 복잡하게 생긴 기계들.
어찌 제품이 나오고 어떤 루틴으로 공정이 돌아가는 지
너무너무 헷갈리고 어려웠다.
신입인 나를 가르치던 선배는
지금은 이리 하고 그 다음엔 이리 하고 하며 직관적인 설명을 해주며
친절히 가르쳤지만 모든 것이 너무도 생소했던 나는 힘든 적응기를 보냈었다.
시간이 흐르고 알게 되었다.
무턱대고 이리 해라 저리 해라 하고 가르칠 게 아니라
이런 원리다 하고 큰 그림을 설명해 줬다면
너무도 쉽게 공정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하고
또한 미처 교육 못받은 돌발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었겠다는 것을.
남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내 안의 지식이 아무리 깊어도 그것을 남에게 온전히 전달한다는 것은
별개의 능력을 필요로 하니까.
서울대 나온 수학 선생님이 학교에 부임했다고 해서 학생들 수학 평균이 오르지도 않고
세계적인 선수가 은퇴해서 감독이 된다고 해서 a급 감독이 되는 것도 아니더란 거지.